떡 장수에서 외교관, 기업인으로 변신한 이하영 [더 라이프이스트-성문 밖 첫 동네, 중림동 이야기]

입력 2023-08-17 17:17   수정 2023-08-18 09:07



대륙고무주식회사를 창업한 이하영 대감에 대해 들어보셨는가? 중림동에 고무신 공장이 있었다는 것도 생소한 이야기일 텐데…이하영 대감? 그런데 우리 근대사에 이렇게 재미있는 사람도 흔치 않다. 그의 인생을 소개하고자 한다. 그는 임진왜란 때 공을 세운 권율 장군의 사위, 경주이씨 백사 이항복(白沙 李恒福, 1556~1618)의 10대손이다. 같은 항렬의 이회영(李會榮, 1867~1932) 선생은 조선이 멸망할 때 어마어마한 재산을 모두 처분하고 만주로 떠났다. 이회영 선생의 동생인 이시영 선생은 임시정부 요원으로, 귀국 후 이승만 정권에서 초대 부통령을 지냈다. 이하영의 족적은 가진 자의 사회적 책임을 다한 이회영 선생과는 많이 다르다. 이하영은 부산 초량에서 떡 장사를 하다 큰 돈을 벌어 볼 요량으로 일본으로 건너가지만 동업자에게 사기를 당해 알거지가 된다. 간신히 돌아오는 배삯을 마련했는데, 배 안에서 인생의 은인을 만난다. 우리나라 최초의 선교사인 호러스 뉴턴 알렌(Horace Newton Allen 1858~1932)이다. 알렌은 조선의 미국 공사관 소속 의사로 부임하기 위해 배를 탔다. 두 사람은 1858년생 동갑내기로 이 때가 고종 21년, 1884년이었다.


1858년은 무슨 해(年)일까?

60세가 넘은 사람들 중 가장 눈에 띄는 사람들이 ’1958년생 개띠‘들이다. 이들은 한국전쟁 이후 출생한 베이비부머 첫 세대로 산업화와 민주화를 온몸으로 겪은 시대의 증인들이다. 그렇다면 그로부터 일백년 전, 1858년생들은 어떤 삶을 살았을까? 1858년생 동갑내기 말띠인 이하영과 알렌, 이들은 이후 조선에서 거칠 것 없이 화려한 인생을 펼치게 된다.

알렌은 오갈 데 없는 이하영을 요리사로 채용했고 이하영은 알렌의 입이 되어 주었다. 이하영은 알렌에게 영어를 배웠고 갑신정변 후 민영익을 치료하며 고종의 신임을 얻은 알렌의 천거로 고종의 영어 통역관이 되었다. 이하영이 어떤 영어를 구사했는지, 그가 한 요리를 알렌이 먹을 수 있었을지 의문이 남지만 그는 일약 외아문 주사가 되었다. 1888년 박정양이 주미공사로 갈 때 2등서기관이 되어 1등서기관 이완용, 이상재와 함께 미국으로 건너 간다. 떡 장수가 외교관이 돼 미국 공사관에 근무하게 된 것이다. 그때나 지금이나 영어의 힘은 대단하다. 고종은 떠나는 그에게 밀명을 하달한다. 미국에서 200만 불의 돈을 빌리라는 것이었다. 미국 선박이 부산, 원산, 인천항에 들어올 때 내야하는 무역 관세 명목으로 빌려 미국 군인 20만 명을 데리고 돌아오라는 황당무계한 밀지였다. 이 내용을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모르겠으나 이하영 본인이 쓴 '한미국교와 해아사건'(신민, 1926년 6월호)의 내용이다. 그런데 문제는 엉뚱한 곳에서 터졌다. 청나라가 자신들의 허가 없이 미국에 외교관을 파견한 것에 대해 트집 잡았다. 주미 공사 박정양과 함께 간 이상재, 이완용은 청나라의 압력으로 귀국할 수 밖에 없었다. 졸지에 혼자 남은 이하영이 미국 공사 대리가 된다. 그는 뉴욕은행에서 100만불을 무역 관세 명목으로 먼저 차입했다. 간이 배 밖으로 나온 이하영은 그 돈을 물 쓰듯이 쓰며 워싱턴 밤거리의 황제로 군림한다. 얼마나 허세를 부리고 돈을 펑펑 써댔는지, 미국 외교가에서 백인 미녀에게 청혼을 받을 정도였다.

상투 튼 머리에 이상한 옷을 입고 수염을 기른 동양의 외교관에게 미국의 미녀들이 정신이 나간 것이다. 그러다 정신이 번쩍 들어 계산을 해보니 100만 불 중 16만 불을 탕진했다. 이 일을 어찌 할까 고민하다 올 것이 왔다. 은행장을 대동한 미국 외교관의 호출이었다. "미군을 파견하는 문제를 상원에서 협의했는데 부결되어 미안하다"는 것이다. 하지만 이미 사용한 16만 불은 갚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었다. 운 좋게도 일이 너무 잘 풀렸다. 조선으로 돌아온 그는 다시 탄탄대로를 걷는다. 한성판윤을 비롯, 중앙관아의 핵심 인물로 뜬다. 망해가는 조선에서는 어떻게 처신하느냐가 출세의 관건이었다. 1904년에는 그 잘하는 영어 실력으로 외무대신에 올랐다. 1905년, 표면상 을사늑약을 반대해 을사오적에는 이름이 없다. 합병 후에는 중추원 고문, 일제의 귀족 작위를 받았고 은사금도 두둑이 챙겼다. 윤치호의 일기에 따르면 그가 얼마나 무식한지 한문으로 된 문서 하나 제대로 작성하지 못했다고 한다. 그러나 조선 천지를 둘러보아도 이 사람만큼 출세하고, 벼락부자가 된 사람이 없다. 그는 시류를 잘 탔고 배짱이 두둑했던 것 같다. 알렌을 만나 영어를 익혀 권력의 정상 언저리까지 갈 수 있었고 나라가 망한 후에는 시류를 잘 읽어 갑부가 되었다. 그가 원효로에 대륙고무신을 세운 해는 1919년이다. 그는 자신을 아꼈던 고종의 승하도, 백성들이 궐기한 3.1운동도 관심이 없었던 듯하다. 고무신 사업이 자리를 잡자 1932년 공장을 세워 중림동으로 이사했다. 시대를 잘 읽은 이하영 대감의 전성기는 이곳에서 정점을 맞이했다. 중림종합사회복지관, 이 자리이다. 이곳에 로또 판매점이 있었다면 1등 당첨이 확실하다.



<한경닷컴 The Lifeist> 한이수 엔에프컨소시엄에이엠 대표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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독자 문의 : thepen@hankyung.com
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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